잡부와 Generalist는 다르다.
기획자(내가 있는 바닥은 IT, 그 중에서도 온라인/모바일서비스 업계다)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이보다 더 자기정체성을 알 수 없는 직군이 있을까. 나도 직장을 구하기 전에는 기획자라는 직군이 있는지 몰랐고, 첫 직장도 개발자로 지원했을 정도로 기획자라는 존재는 알지 못했던 미개인이었다.
잡부의 길
하지만 우연한 기회에 기획자의 길에 접어들고, 나를 오랫동안 괴롭혔던 것은 ‘전문성이 없는 기획자’라는 자괴감이었다. 금손 디자이너와 뇌가 섹시한 개발자들에 비하면 얼마나 하찮은 종족인가. 디자인도 못하고 개발도 못해서 겨우 기획자 한다는 말을 자조섞은 멘트를 수시로 내뱉던 시절이었다. 5년간 개발을 전공했지만 코드 한 줄 적지 못하고 벌레 한마리 잡지 못하는 똥손이었고, 디자인은 아무리 배워봤자 선천적 센스의 영역이었으니까.
1~2년차에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고, 시키는 것도 실수투성이었다. 어딘가로 끌려가 혼나기도 일쑤였다. 머리와 손과 입이 따로 놀았다. 나는 기획자를 하면 안되는 사람인가하고 밤새 생각하곤 했다.
그래도 서당개 3년차 정도가 되자, 내가 할 수 있는 건 ‘개발과 디자인이 아닌 모든 것’을 맡는 일이었다. 특히 이 시즌에는 스타트업을 창업하면서, 본격적인 잡부 시대의 서막을 열었다. 재무, 인사, 총무, 기획, 마케팅 등을 한번에 할 수 있었던 스타트업을 버텼으니 어련했을까. 제대로 배운 적은 없지만, 닥치는 대로했다. 아니, 나 말고는 할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다. 개발자는 개발을, 디자이너는 디자인을 하기에도 빠듯한 시간이니 그런 그들에게 다른 일을 쥐어주는 일은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봤자 ‘이것저것 해본 애’ 정도였다. 전쟁같던 스타트업을 끝내고 밖으로 나오니 기획자의 자리는 점점 사라져갔다. 전문화되어가는 UI/UX 툴들로 인해 내가 해온 기획업무는 점점 디자이너로 대체되어갔고, GA 이벤트 정도만 볼 줄 아는 실력으로는 그로스해커와 데이터분석가들에게 점령당하고 있었다.
제네럴리스트의 길
이렇게 꼬박 5년을, 이 바닥에서 미친듯이 일해놓고 ‘기획자를 못하면 어쩌지?’하는 두려움이 들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디자인이나 인터랙션을 배워볼까요?’ ‘개발을 배워볼까요?’ ‘데이터를 더 배워볼까요?’ 라는 이야기를 한참 떠들고 다녔다. 기획자를 채용하는 회사의 수가 점점 줄어드는게 눈에 보이는데, 내가 갈 수 있는 회사는 2배 빠르게 줄어드는 것 같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성숙기에 접어드는 산업에는 이것저것 하는 사람보단 스페셜리스트를 원한다.
그런데 다르게 생각해보면, 제네럴리스트는 스페셜하지 않은가?
한 분야를 깊게 파고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여러 분야에 걸쳐 파고드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제네럴리스트는 개나 소나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그렇지 않다. 전공과목에서 모두 A+을 받는게 어려운 것처럼, 모든 교양과목에서 A+을 받기도 어렵다. 모든 분야에 있어 ‘만점’은 아니더라도, ‘과락없음’ 대신에 ‘기준점 넘음’이라는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1년차만 5년째 하고 있을 무렵, 나는 제네럴리스트도 스페셜리스트라는 나름의 결론을 세웠고, 잡부 대신 제네럴리스트가 되기로 했다.
잡부와 제네럴리스트는 다르다.
이렇게 나처럼 처음 기획자의 길을 걷게 되는 사람들에게 자주 들을 수 있는 말은, 과거의 내가 했던 ‘나는 잡부입니다’이다. 자신의 업무에 자신이 없고, 이것저것 주어지는 대로 일을 쳐내다보면 ‘나는 누구 여긴 어디’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특히 기획은 스스로 생각하여 끝까지 책임을 지는 일이 생각보다 적고 사장님의 의지대로 시작되고 사장님의 의지로 끝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중간에 와이어프레임이나 그리는 사람이 되기가 쉽다.
하지만, 내가 잡부를 버리고 제네럴리스트로 거듭나기로 마음먹은 이후로 내가 업무를 대하는 태도는 180도 달라졌다. 내가 나를 설득하고, 고집불통인 다른 사람까지 설득하기 위해서 앞을 막는 장벽이 무엇이든 철저히 깨부수기로 했다. 적당히 둘러보고 마는 것이 아니라, 하는데까지 하고 그만 두는 것이 아니라, 이만하면 할만큼 했다라는 생각이 들 때까지, 끊임없이 삽질을 계속했다.
한 번 집어든 삽은 최소 며칠 밤을 새울 때까지, 관련된 자료를 검색해보고 관련된 서적을 독파해가는 걸로 대신했다. 모르는 게 있으면, 그 분야에 있어 알만한 사람을 붙잡고 물어봤다. 그렇게 하면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갈 수 없는 곳이 보이고, 좀 더 노력하면 갈 수 있는 곳이 나누어져 보였다. 러닝커브는 무언가를 배우는 것에 있어서 올라가야하는 경사를 말하는데, 처음엔 물론 힘들다. 하지만 그것을 계속하고, 반복할 수록 언덕을 오르는 체력이 붙는다. 본격적인 제네럴리스트의 길을 걷기 좋은 몸이 되는 것이다.
반복되는 일에서 얻어진 노하우는 있겠지만, 잡부는 기본적으로 대중없이 주어지는 막일을 맡는 사람이다. 제네럴리스트와 잡부를 나누는 것은 그 전문성 한 뼘만큼의 거리다. 그리고 전문성은 꾸준한 노력과 공부에서 얻을 수 있다. 공부하지 않는 사람이, 이것저것 할 줄 안다고 제네럴리스트라고 자칭하는 건 꼴불견에 불과하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길 바란다.
이 글의 영감은 – 회사에서 무엇을 보고 배울 것인가? – 에서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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