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g Opinion

2021년을 돌아보며

December 29, 2021

2021년을 돌아보며

링크를 걸 필요도 없이 2020년 회고를 블로그 첫 페이지에서 넘기지 못한채 한 해를 마무리한다. 올 한해는 정말 바쁘게 살아냈다. 살았다는 말로는 부족한 해였다. 정말이지, 살아냈다. 사실 그 동안에 쓰려다 삼킨 몇개의 글이 더 있다. 팀장 1년 회고 라거나 커뮤니티 죄책감 같은 글을 초안의 수정까진 해두었지만 결국은 공개하지 못했다. 그렇게 한해를 보낼 줄이야. 지금에서야 글을 내보내긴 늦었고, 그나마 써둔 글이니 올해 회고에 조금 녹여본다.

사실은 말이야

2020년 1월께 팀장이 되었으니, 올해 말로는 벌써 꽉 채우는 2년이 되었다. 1년차는 당연하게 모든 것이 처음이던 시절이다. 채용도 적극적으로 해보고, 민망한 1 on 1 미팅이 더 이상 손발 오그라들지 않을 때까지 밥먹듯이 하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팀에 퇴사자도 있었고, 조직개편도 하면서 플랫폼성 도메인에서 서비스향 도메인으로 R&R도 바뀌었다. 어쨌거나 이렇게 저렇게 부딪히면서 하나씩 주어진 과제를 해냈다. 하고싶은 일에 비해서 인력 충원이 쉽게 되지 않아서 욕심낸만큼 많은 일을 해내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은 발자취들을 남길 수 있었다.

프랜차이즈시스템팀은 나를 제외하고 기획2, 백엔드2, 프론트 4 정도의 팀이었다. 10명이 채 되지 않는 팀. 익스터널 어드민, 인터널 어드민, 배민앱 브랜드관, 사전예약프로젝트까지 한걸 굳이 쓰고보면 참 많은 걸 했네. 특히나 사전예약은 프랜차이즈시스템팀을 처음 맡았을 때, 케익예약 하게하자! 라는 이야기가 씨가 되어 시작된 프로젝트다. 유관부서들이 매우 바쁜 와중이어서, 프로젝트 지원을 제대로 받기 어려웠고, 뭣모르고 A to Z 신규 시스템을 구축하자는 결정을 했다. 상품, 전시, 예약, 구매, 빌링, 차액대사, 현금영수증, 본사와의 중계연동까지 지금 생각하면 작은 커머스 하나를 뚝딱 만들어냈다. 수천만원에서 수억원까지, 단 5분만에 매진되는 사태에도 장애한번 없이 지금까지 무장애급 서비스로 운영되고 있다. (소규모 장애 딱 한번.)

프랜차이즈시스템은 말하면 딱 아는 메인 플랫폼은 아니었지만, 잘하고 있었고 더 잘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설마 나만 그렇게 생각했나?!) 앞으로의 과업이 가득한 상태에서 갑작스런 서비스실로의 이동은, 더군다나 배민선물하기 전담팀이 되는 것은 사실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못해서일까, 더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일까, 목적조직이었던 팀 구성이 선물하기를 맡기기에 적당해서였을까. 추측할 수 있는 많은 이유는 있었고, 설득에 쓰인 이야기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납득이 쉽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첫 번째 위기.

팀 구성원들의 반발이 적지 않았고, 조직장으로서 설득의 근거를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 그러기엔 일이 먼저 찾아왔다. 발령이 나지 않았지만 온갖 이메일 포워딩에 캘린더에 일정이 스며들었다. 정신차리니 인수인계를 받고 있었고, 정신차리니 선물하기에 새로운 기능을 배포를 하고 있었다. 여기저기 콜트콜 오는 요청들을 정신없이 받아주는 와중에 사업까지 총괄하게 되며 지표의 지옥에 빠져들었다. 오오 사업계획.. 나도 그 지옥문을 열어보다니. 엑셀 때문에 밤 새본게 언제인지 아득한데. 낮에는 팀장으로, 밤에는 기획자로, 새벽에는 사업담당자로 혼자서 하루 3교대를 했다. 업무를 나눌 기획자도 없었다. ex-프차팀은 다른 프로젝트를 하고 있었다.

홀로 선물하기를 막아내고 있는동안, 그 프로젝트는 4월에나 끝났다. 그 와중에 조직개편으로 다시 프랜차이즈시스템팀이 생기면서, 팀원의 일부를 새 빌딩을 위해 내어주어야 했다. 아니 그럴거면 왜 없앤거야? 왜 내가 가는거야? 라는 얘기가 마음에 비수가 되었다. 상위의 의사결정이 있었지만, 나는 누구하나 납득시키지 못해 입을 닫을 수 밖에 없고, 그저 통보밖에 방법이 없던 시기가 있었다. 이쯤되니 사전예약과 브랜드관 업무는 선물하기팀이 맡을 이유가 없는데 도대체 왜 해야되는 지에 대한 아우성도 빗발쳤다. 부문장까지의 컨펌을 얻어내서야 맡아줄 담당팀을 찾아 수소문하고 부탁하고 인수인계를 마치고, 또 마치고, 또 마쳤다. 어느새 9월에 접어들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2021년이 안정기에 들어설 것이라 생각했다. 새로 입사한 분들이 있었고, 선물하기 2.0 프로젝트는 순항 중이었다.

그리고 암초. 두 번째 위기.

9월에 들어서며, 우리가 부딪힌 암초는 또 한번의 조직개편이었다. 아니, 암초가 아니라 빙산에 부딪힌 느낌이었다. 쇼핑라이브 서비스팀과 파트너팀과의 합병이었다. 대략 40명 정도 규모에 달하는 거대 조직이 탄생하려는 순간이었다. 마음에 여유가 있었다면 하지 않을 이유도 많았고 해서 좋을 이유도 많았다. 함께 했을 때 시너지를 낼 수 있는 부분이 분명히 보였다. 각 팀이 가진 단점을 상쇄시킬 수 있는 부분도 있었다. 선물하기 팀으로 전향될 때, 어차피 상위 결정이 뒤집히는 일은 많지 않을거라 생각하고 빠르게 받아들였다. 조직개편 이야기가 나온 날부터 세개 팀의 로드맵을 전부 꺼내서 맞춰보고, 위키를 전부 복습하며 과제 현황에 대해 대정리를 시작했다. 진행되는 과제를 제외하고, 백로그만 700~800개였다. 한줄 한줄 지워가며, 미래를 계획하는 동안 그렇게 모두가 스쿼드로 발령이 났다.

이때는 몰랐지만, 내가 나중에 깨닫게 된 것은, 선물하기팀이 어려운 과제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팀원을 너무 믿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혹은 내 영향도에 대해 과소평가 했을지도 모른다. 디렉터가 빠져나가면서, 프로젝트는 균열이 일고 있었고 나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미경님은 바쁘니까 우리끼리 해보자하고 참고 일하던 팀원들의 스트레스도 폭발했다. 그제서야 실수를 깨달았지만 되돌리기엔 너무 늦었었다. 서비스를 오프하고나서야 알았으니 말이다. 스쿼드 안정화로 여러 방면으로 도입했던 새로운 프로세스들이 프로젝트에 병목을 만들었고, 매달 한번씩 하던 면담도 3개월동안 하지 못했다. 1 on 1이라도 했더라면. 성급하게 프로세스를 손대지 말걸. 그냥 둘껄. 조급했던 결정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힘듦을 가중시켰다. 내 책임이다.

나는 힘들었다.

앞에서는 힘내는 척, 응원하는 척, 위로하는 척 해야했지만 수시로 주저앉고 있던 나였다. 이 회사를 다니면서 처음으로 다 그만두고 싶단 생각을 했다. 동료들과 술마시다가 울고, 조직장이랑 면담하면서 울고, 선물하기 오픈하고 나서도 팀원들 앞에서도 울었다. 고작 보름 사이에 일어난 일들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무너지고 있었다. 서로 신뢰해본 적 없는 사이에서 걸려오는 블레임은 생각보다 견디기가 훨씬 힘들다. 나를 모르고, 나의 일을, 나의 어려움을 알기 어려우니 내가 더 다가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단체 메일도 보내고, 웃으면서 면담도 하고, 코로나 검사를 수시로 당하면서도 만나서 차도 마시고 밥도 먹으며 스킨십을 하면서. 크게 생각하지 않고 그렇게 나가면 된다고 생각하고있고 다행이 지금은 회복 중이다.

오늘 이 긴 글을 쓰게된 것도 사실 디즈니 영화 덕분인데. 엔칸토에서 마법의 힘으로 힘이 센 언니 루이사가, 부담감과 책임감 속에서 많은 감정을 느끼지만 표현할 방법을 찾지 못하는 상황을 그린 곡이다. (결론은 쌩뚱맞지만, 디즈니플러스에서 보기에 적절하다.)

사실은 말이야
해내지 못하면 난 가치 없는 사람
사소한 실수도 안돼 마치 살얼음판
끊임없이 뚝뚝뚝 떨어지는 자신감
한계까지 툭툭툭 쌓이는 부담감
감당 못하면 나는 어쩌지?

나도 지금의 자신감은 사실 높지 않고, 부담은 한계에 간당간당한 수준이다. 감당 못할 일이 분명히 있고, 어려움이 있다는 걸 인정하는게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한 솔루션이라는 것도 안다. 이 어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솔직해지는 것이며, 어렵고 힘든건 힘들다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것은 성장통이며, 어려움을 피하지 않으면 분명히 성장한다 고 믿는 것 뿐이다.

이직 대신 선택하기로 한 것

이 타이틀에 놀랄 분들이 꽤 많을 것 같다. (놀라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무엇보다 여기까지 읽었다면 대단하신겁니다. 일단 칭찬의 박수 👏) 이 질문을 던진 계기는 동욱(향로)님의 이직이었다. 커리어의 전환을 결정하게된 과정과 근거를 나열해주는 것을 보면서 생각보다 나도 오래 고민하고 (약간의 우울감과 함께) 성찰을 하는 시간이 있었다.

앞으로 나는 무엇을 위해 이직을 결정할 것인가. 올해만 해도 몇차례, 좋은 조건의 오퍼가 있었다. 문제는 나는 원래가 가슴뛰는 서비스가 없고, C레벨이 되겠다는 야망도 없다. 전직장 스톡옵션이 얼마까지 올랐더라 하는 카더라는 배아프지만, 그렇다고 다른 로켓에 굳이 매달리고 싶은 생각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대기업으로 가서 더 큰 판을 벌리고 싶은 생각도 없다. 시니어 레벨이 이직하면 조직의 신뢰를 얻고 성과를 보이는데 최소 2년은 걸린다. 잦은 이직이 주는 스트레스에 이골이 났기 때문에 앞으로도 몇년은 이직할 계획이 없다. 무엇보다 이 회사에서 이직을 할만한 이유를 찾는다면, 이 회사에서도 충분히 찾을 수 있는 일 같기도 하다. 신사업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것도 아니며, 개선하고 싶은 시스템도 많아서 언제든지 어디로든지 팀을 옮기면 그만이다. 서비스니 플랫폼이니 시스템이니 한바퀴를 돌고보니 무엇을 만드는 기획 일에는 더이상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것인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조직을 빌딩하는 데에도 2년쯤 하다보니 채용도 반복업무이자 일상업무나 다름없어서 뭔가 새로운 도전을 느끼지도 못하는 것 같다. 아니 그냥 지금은 아무일도 하고싶지 않은 상태일지도 모르겠다.

나의 일의 의미를 찾는 것이 너무 늦었나 싶지만, 오랜 생각 끝에 다다른 곳은 동료의 성장과 자존감이었던 것 같다. 커뮤니티를 10년 가까이 운영하면서 생각한 것도 IT업계에 있는 사람들이 하고싶은 일하며 좀 더 행복하게 일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고, 창업을 하며 지었던 사명조차도 우리 스스로 잘한다는 것을 증명하자라는 의미를 담기도 했었다. 블로그를 하거나 어느 컨퍼런스에 가서 발표를 하는 것도 처음엔 나 잘났다고 하는 발표였을지 모르겠지만 내가 했던 고생을 남이 덜했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고, 앞으로 계속 하고싶은 일들도 그런 맥락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기획자로서, 프로덕트 매니저로서의 전문성을 키우는데 욕심나지 않고. 조직장이나 전략가로서 제품 방향이나 이런걸 정하는데에 목숨걸지 않고. 누구나 일을 잘할 수 있는 환경과 사람을 생각하는 프로세스, 인풋과 아웃풋, 아웃컴이 연결되는 프레임워크를 만드는 것. 이런 일들에 조금 더 애정이 있고 애착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 올해의 가장 큰 수확이지 않을까. 다행이 이런 고민을 상반기에 정리할 수 있었고, 하반기에는 덕분에 많은 곳에 하나씩 활동을 재게하게 된 계기를 만들어 준 것 같다.

이 결정은 앞으로 커뮤니티 오거나이저로서 타인에게 판을 깔아주는 일을 그만하겠다는 선언에 가깝다. 대신 내가 가진 내공을 컨텐츠로 바꾸어 널리 퍼트리는 일. 그래서 지난 2년간 커뮤니티를 운영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은 내려놓고, 실무에서 더 멀어지기 전에 플레이어로 뛰어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하지만 여력이 된다면 판은 언제라도 깔것이다..)

그 외에는 팀에서는 독서모임과 역량강화모임 등을 주기적으로 만들어가고 있고, 11월~12월 두달동안 PM인턴도 채용해서, 내년에는 신입 기획자를 위한 커리큘럼도 짜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간 책 한권 쓸 수 있겠지 하면서.

이렇게 한 해를 마무리한다. 언젠가 올해의 글을 되돌아볼 때에 그래 너 참 고생 많았었구나. 하고 토닥여줄 수 있는 큰 언니가 되어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