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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서부 2주간의 여행기 – 첫번째, 레이니어 국립 공원을 다녀와서

July 8, 2015

미국 서부 2주간의 여행기 – 첫번째, 레이니어 국립 공원을 다녀와서

전체 2주간의 일정 중에 시애틀에서만 4박 5일을 보냈다. 한국에서 도착한 날과 샌프란시스코로 이동하는 날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온전히 3일을 보낸 셈인데, 이 정도면 시애틀 일정으로는 많이 잡은 것이라고 한다. 사실, 그도 그럴것이 둘째날 이미 후회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애틀에 왜 이렇게 오래 있을까, 가 아니라 미국에 왜 왔을까, 라는 고민을 할 정도 :)

첫째날에는 정말 좋았지만 둘째날 저녁이 되니 볼만한 것은 다 본 것 같고, 명소라고 소개된 곳들도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호스텔은 왜 이렇게 신났는지 새벽 2시까지 바에서 음악을 시끄럽게 틀고 있어서 잠도 제대로 못 잤다. 비행기에서도 거의 못 자고, 호스텔에서도 3, 4시간 정도 밖에 못 잔데다 찾아간 곳들도 별로였으니 별 생각이 다 들 때였다.


(나는 여기서도 현기차를 못 벗어나나 싶었지만 그래도 이땐 마냥 신남)

그래서 갈까말까 망설였던 레이니어 국립 공원에 가기로 결심했다. 여기라도 안 가면 정말 할 것이 없을 것 같아서. 그래서 새벽부터 렌트카 가게 열자마자 차를 빌려서 바로 떠났다. 그리고 그제서야 여행의 진짜 맛을 느꼈다. 차 없는 미국여행은 반쪽자리도 안 된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면서.


(오랜만에 사진으로 봐도 느끼한 그 날의 점심)

시애틀의 가까운 근교로만 알고 운전대를 잡았는데, 알고 보니 서울-대전 거리였다. 막히지 않는 길이라 신나게 달렸는데 끝도 없이 이어졌고, 슬슬 지겨울 찰나에 도착했다. 도착한 곳은 국립공원 전 마지막 마을인데 기차칸을 활용한 음식점이 있었다. 간단히 오믈렛을 시켰으나 토할 것 같이 양이 많았다. 생각해보니 미국 와서 하루 세끼를 먹은 적이 없다. 이렇게 양을 많이 주기 때문에 제대로 먹는 것은 하루에 한끼 밖에 안 되는 것 같다. 나머지는 간식거리로 때우고. 여튼, 다시 운전대 잡고 가는데 너무 니글거려서 중간지에서 한참 쉬다가 다시 운전을 했다. 그 중간지는 롱마이어라는 곳인데, 굉장히 큰 나이테가 전시되어 있다. 무려 700년의 역사가 담긴 나이테다.


(잠깐 쉬기로 한 롱마이어)


(사람과 같이 찍혀있으니 더 실감나는 사이즈)

레이니어 국립공원은 눈 덮인 산 정상이 바로 육안으로 보이는 것이 유명한데, 이 날은 안개가 굉장히 심하게 껴서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운전 할 때도 앞 차의 꽁무니만 보일 정도였다. 그래서 다녀온 이후로 사진을 검색해보면 내가 갔던 곳이 여기가 맞는 것인지 의심이 될 정도다. 나는 정말 하나도 못 봤기 때문에 😡 Visiting Center 를 지나 간단히 하이킹 코스에 올랐다. 여행책에는 1시간 짜리 코스이고 산책이라 봐도 무방하다고 써있어서, 달랑 핸드폰 하나 들고 올랐다. 물도, 지도도, 선글라스도, 선크림도, 스틱도 없이. 그렇게 3시간 동안의 고행길이 시작됐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야생화를 구경하는 짧은 코스가 있고, 뷰포인트까지 오르는 하이킹 코스가 있는데 나는 후자를 선택한 것이었다.


(남들이 찍은 비지터 센터 사진은 이쁘던데, 나는 온통 안개뿐)

출발점부터 해발 2000m 가 넘는 곳이라서 초반부터 금방 숨이 찼는데, 후반부에 비하면 그건 약과였다. 초반 10분 정도만 지나면 눈 밖에 없다. 그래서 3시간 가까이 계속 빙판 길을 걷는 것과 다름 없다. 중간에 한 번 당황했던 때가 있었다. 온통 눈으로 덮여있고 안개마저 심해서 앞의 무리도 뒤의 무리도 전혀 안 보였던 때가 있었다. 당연히 아무 것도 들리지 않고. 말 그대로 허허벌판에 혼자 있는 느낌이라 약간 겁도 났었는데, 조금 있다가 안개 속에서 나타난 외국인 커플이 참 도움이 됐다. 전혀 안면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말도 잘 통하지 않더라도, 같은 목적지로 함께 걷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이렇게나 도움이 될지 몰랐다.


(눈과 안개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음)

가면서 일행이 생기긴 했지만 지도도 없고 안내판도 제대로 없는 상황이라, 내가 지금쯤 어디까지 왔는지 알 길이 없었다. 갈 때는 참 막연하고 힘들게 올라갔는데, 올 때는 즐겁게 금방 내려왔다. 이 정도의 길을 그다지도 야단스럽게 올라왔나 싶은 생각도 들었고. 누구나 한 번쯤 이런 경험은 있지 않을까. 점심 시간에 모르는 식당에 갈 때는 멀게 느껴진 길이, 다시 회사로 돌아올 때는 의외로 금방이다. 경험이 그렇게 중요하다.


(잠깐 하늘이 갰을 때 찍은 사진)

나는 가벼운 산책 정도로 알고 오른 탓에 선크림을 전혀 바르지 않았는데, 눈의 빛이 이렇게나 강한지 처음 알았다. 안개가 껴서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으니 햇빛은 없었는데도, 다음날 온통 얼굴이 빨갛게 익어서 세수할 때마다 살갗이 벗겨졌다.

써놓고 보니 무슨 에베레스트라도 다녀온 것만큼 거창한데, 내가 워낙 가볍게 여기고 시작했던 탓이 큰 것 같다. 물과 선크림, 선글라스만 준비한다면 더없이 좋은 관광 코스가 아닐까 싶다. 미국에 와서 한 것 중 여기 간 것이 제일 잘 한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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